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🦷 이요정님, 동전 있을 때 오세요

by wellingtonnurse 2025. 10. 12.

아이가 빠진 이를 들고 있는 사진

 

L

“엄마! 이거 봐요!”
다급한 목소리에 놀라 달려가 보니, 아이의 손 위에 하얗게 빛나는 조그만 이빨 하나가 놓여 있었다. 벌써 열두 번째다. 피가 살짝 묻은 잇몸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아이의 얼굴엔 뿌듯함이 가득했다.

그 순간, 나 어릴 적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.
이빨을 뺀다는 건 내겐 공포였다.
아빠는 언제나 이빨 빼기 담당이었고, 실로 묶어 문고리에 연결한 뒤 “하나, 둘, 셋!” 하며 문을 쾅 닫았다.
그때마다 나는 울고, 아빠는 땀을 흘리고, 온 집안이 떠들썩했다.

그런데 외국에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, 여긴 완전히 다르다.
치과는 비싸기도 하지만, 대부분의 부모들이 집에서 아이의 이를 직접 빼준다.
처음엔 정말 난감했다.
생전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으니, 무섭기도 하고 자신도 없었다.

그러던 어느 날, 큰아이의 첫니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.
결국 인터넷을 검색해 ‘덜 아프게 이 뺄 때 묶는 매듭’을 찾아 동영상 몇 개를 보고 나도 도전했다.

그런데… 손이 덜덜 떨렸다.
‘이러다 피가 너무 나면 어떡하지? 혹시 잇몸이 찢어지면?’
별별 걱정이 다 들었다.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이가 ‘툭—’ 빠졌다.
순간, 나도 모르게 “됐다!” 하고 소리를 질렀다.
아이는 놀라서 멍하니 나를 쳐다보다가, 곧 활짝 웃었다.

그 이후로 아이는 스스로 이를 뽑는 길을 택했다.
이젠 내가 나설 일도 없다.
“엄마, 나 이 빠졌어요!” 하며 어느 날 갑자기 손에 이를 들고 나타난다.
그 표정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.

한국에선 조금만 흔들려도 치과로 달려가던 나였는데, 여긴 완전히 다르다.
아이들이 흔들리는 이를 몇 주, 길게는 몇 달 동안 그냥 두기도 한다.
어떤 아이들은 어른니가 새로 나와도 흔들리는 이를 그대로 둬서, 위아래로 이가 두 줄이 되기도 한다.
그런데도 다들 여유롭다.
“괜찮아, 언젠간 빠질 거야.”
이 나라 사람들의 태도는 참 느긋하고 여유롭다.

나처럼 ‘한국 엄마’로 자란 사람에게는 그게 처음엔 정말 답답했다.
‘이게 썩으면 어떡하지? 교정이라도 해야 하면 어떡하지?’
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.
하지만 이제는 마음을 다잡고 이렇게 생각한다.
“그래, 언젠간 다 빠질 거야.”

요즘은 아이가 이를 뽑아 나에게 건넨다.
빠진 이를 작은 종이에 싸서 베개 밑에 살짝 넣어두고는,
다음 날 아침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.
“엄마! 이요정이 왔다 갔어요!”

그렇다.
이곳에는 ‘Tooth Fairy’, 즉 이요정이 있다.
빠진 이를 가져가고, 대신 코인이나 돈을 놓고 간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.
덕분에 우리 집엔 늘 현금을 준비해야 한다.
언제 어디서 이요정이 들를지 모르니까.

문제는 요즘 세상에 현금이 거의 없다는 것.
카드만 쓰다 보니 동전은커녕 골드 코인 하나 찾기도 힘들다.
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서랍 속에 꽁꽁 숨겨둔 지폐를 꺼내 베개 밑에 몰래 넣어둔다.
처음엔 5불, 가끔은 10불, 정말 없을 땐 20불짜리까지.
그랬더니 이놈, 생니도 뺄 기세다.
“엄마, 이거 좀 흔들리는 것 같아요!” 하며 거울을 들여다본다.

요즘 우리 집은 ‘이요정 프로젝트’ 덕분에 동전 대비를 해야 한다.
큰아들은 이제 거의 모든 유치를 스스로 뺐고,
둘째(8살)는 아직 앞니 두 개, 아랫니 두 개만 갈았다.
도통 흔들릴 기미가 안 보이니 요즘 내가 먼저 재촉한다.
“이야~ 너 이가 언제 빠지려나? 좀 흔들어봐라~”

나도 웃기다.
예전엔 무섭다고만 생각했던 ‘이 빠지는 일’이

피가 나도 괜찮고, 흔들려도 괜찮고, 늦어도 괜찮다.
모든 건 각자의 속도로 진행되고, 그게 또 인생 같다.

오늘도 나는 아이의 하얀 이를 바라보며 기도한다.
“이요정님, 동전 있을 때 오세요.” 🪙✨